조용한 파괴자

 왜 우리는 평생 일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할까?



부모님이 가르쳐준 인생의 진리는 열심히 노동하고 저축하는 것이었다. 28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처음 자리 잡은 숙소는 월 25만 원의 1.5평 고시원이었는데, 침대와 책상이 겹쳐서 배치된 비좁은 구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시원은 강남구청역 인근에 위치했다. 도보로 10분만 걸으면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청담동 명품 거리까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고시원 정문을 열고 나오면 곧장 청담동의 화려함이 펼쳐졌기에, 어둡고 음울한 방에 있다가 다른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유한 아파트가 큰 대로를 따라 줄지어 있었고, 1층에는 테라스 카페가 많았다. 밤이 되면 노란빛 전구가 밝게 빛나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서 1년을 살았지만 나는 한 번도 카페에 가본 적이 없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왠지 그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당시 월급 167만 원 정도에 연 1회 상여금이 조금 지급되는 회사에 다녔는데, 고시원비와 생활비를 다 쓰고도 100만 원 가까이 저축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들뜬 마음과 젊음이 비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흑백 사진 같은 고시원을 나와 바쁜 사람들 속에 섞이면 비로소 삶에 색이 입혀지는 것 같았다. 출근길에 보이는 멋진 아파트를 보며 막연하게 ‘나도 언젠가 저기에 살 수 있을까?’라는 헛된 꿈을 꾸며 혼자 웃기도 했다.

2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급여는 200만 원 초반으로 올랐고, 나는 더 열심히 저축했다. 그만큼 자신에게 가혹하게 채찍질하며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계속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았다. 사는 곳도 나아졌다. 대출을 조금 보태 보증금 6,000만 원의 원룸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거봐, 열심히 살면 계속 나아지잖아."라며 스스로 대견해했고, 나아진 삶에 가족 모두가 기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힘들었던 경험도 기억 속에서는 미화되기 마련인가 보다.

당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누구도 금융 지식이 없었다. 이 나이에 이르러 내가 깨달은 슬픈 진리는, 부자의 자녀들이 단지 자산을 물려받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인 '금융 원리'를 부모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부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업무 특성상 부유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은퇴 후 노후를 보내는 60대 후반의 남성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자녀와 미국 투자나 달러 채권에 대해 자주 논한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지식을 얻었느냐고 묻자, "젊은 자녀와 소통하려면 스스로 공부해야 하고, 직접 투자하며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답했다.

부모님은 성실히 저축하며 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고 늘 말씀하셨다. 평생 그 가르침을 실천해오신 부모님조차 정작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셨는데, 나 역시 같은 굴레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왜 누구도 나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평생 저축만 한다면 우리는 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파도와 싸워야 한다. 시중 은행 이자 3%로 10년을 저축했다고 가정해 보자. 설레는 마음으로 은행에 가니, 그동안 저축한 가치의 20%를 제하고 돌려주는 셈이다. 황당하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와 상관없이 세상에 돈이 흔해지면서, 1,000원 하던 라면의 판매자는 이제 1,200원을 요구한다. 돈보다 라면이 더 귀해진 것이다.

아파트 가격은 또 어떠한가. 지난 10년 동안 50% 넘게 올랐다. 아파트의 가치가 특별히 상승해서가 아니다. 건물은 10년 동안 낡았음에도 가격은 50%나 더 비싸졌다. 내 수중의 돈은 끊임없이 가치를 잃는 반면, 실물 자산의 가격은 올라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인플레이션의 민낯이다.

여러분의 첫 사회생활 장소는 어디였나요? 혹시 여러분도 '성실함의 배신'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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