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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잃은 출근길, 방향을 잃은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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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직장으로 출근하던 날, 내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지하철을 타는 일이었다. 다행히 서울에 먼저 자리 잡은 친구가 가까운 역까지 동행해 주었지만, 친구도 출근해야 했기에 결국 혼자 길을 찾아야 했다. 엄청난 인파에 휘말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고, 떠밀리듯 사람들 틈에 끼어 당황할 뿐이었다. 친구는 "주황색 선만 따라가서 타고, 사람이 제일 많이 내리는 곳에서 그냥 따라 내려"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내게는 모든 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는 것 같아 난감하기만 했다. 지금 떠올려 봐도 그때의 기억은 아찔함과 막막함으로 가득하다. 방향성이 없기는 5년이 지난 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에 주식 공부를 시작했고, 어설프게 입문서 몇 권을 사서 읽어보았다. 그러나 금융 지식이 전무했던 내게 주식 책은 마치 외국어 같았다. 자연히 공부는 등한시한 채 편한 길만 찾게 되었고, 결국 3개월에 100만 원을 내면 급등주를 추천해 준다는 유사 투자 자문 사이트에 가입했다. 화려한 과거 성과들에 마음이 혹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책 없고 무모한 투자가 시작되었다. 당시 같이 일하던 후배는 내가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끼워달라며 졸랐다. 결국 서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함께 투자를 시작했다. 종목 추천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바뀔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업무 중에 손절가와 익절가를 체크하며 따라가기란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크게 투자해 볼 만한 종목이 추천되었고 우리는 겁도 없이 수천만 원씩을 쏟아부었다. 종목 알림을 받자마자 급하게 매수를 마친 뒤, 허탈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나누었던 대화를 잊을 수 없다.  "근데, 우리가 방금 산 종목 이름이 뭐였지?" 나는 7,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했고, 후배도 2,000~3,000만 원 정도를 넣었던 것 같다. 이후 1년 동안 수익률이 -50%에서 -70% 사이를 오가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

깨달음은 왜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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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과 인내심은 분명 삶을 나아지게 한다. 다만, 그 열매를 맺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길 뿐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부나 운동, 뭐 하나 특출나게 잘하는 것 없이 뚜렷한 목표나 열정도 부족한 채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제 갈 길을 찾아 앞서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뒤늦게 위기감을 느꼈고, 등 떠밀리듯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준비 없이 뛰어든 세상에서 고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 얻은 전세방 창문을 열면 바로 소음 방지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벽과 건물 사이는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벽 너머에는 지하철과 KTX가 수시로 오가는 철길이 있었다. 이사 첫날부터 두 달 동안은 기차 소리가 잦아드는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도대체 소음 방지 벽을 왜 설치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동네였다. 그럴 때면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자다’라는 동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잠들 수 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두 달이 지나자 나에게도 소음과 진동을 이겨낼 내성이 생겼다. 가끔 놀러 온 동료들이 다음 날 아침, 이 소란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곤히 잘 수 있냐며 놀랄 정도였다. 그 무렵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 둘 다 앞날이 막막한 처지였지만, 결혼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재정 계획을 짜며 부족하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당시 상대방은 경제 관념이 부족해 수중에 단돈 100만 원도 없는 상태였다. 나는 저축을 먼저 하고 남은 돈으로만 생활하는 방식을 고집했고, 그녀는 순진하리만큼 잘 따라주었다. 형편은 넉넉지 않았지만, 미래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함께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다. 그 시절, 나는 돈에 대해 가장 처절한 갈증을 느꼈다. '내가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고 바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늘 가슴을 짓눌렀다. 서울에는 부자가...

조용한 파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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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평생 일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할까? 부모님이 가르쳐준 인생의 진리는 열심히 노동하고 저축하는 것이었다. 28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처음 자리 잡은 숙소는 월 25만 원의 1.5평 고시원이었는데, 침대와 책상이 겹쳐서 배치된 비좁은 구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시원은 강남구청역 인근에 위치했다. 도보로 10분만 걸으면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청담동 명품 거리까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고시원 정문을 열고 나오면 곧장 청담동의 화려함이 펼쳐졌기에, 어둡고 음울한 방에 있다가 다른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유한 아파트가 큰 대로를 따라 줄지어 있었고, 1층에는 테라스 카페가 많았다. 밤이 되면 노란빛 전구가 밝게 빛나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서 1년을 살았지만 나는 한 번도 카페에 가본 적이 없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왠지 그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당시 월급 167만 원 정도에 연 1회 상여금이 조금 지급되는 회사에 다녔는데, 고시원비와 생활비를 다 쓰고도 100만 원 가까이 저축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들뜬 마음과 젊음이 비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흑백 사진 같은 고시원을 나와 바쁜 사람들 속에 섞이면 비로소 삶에 색이 입혀지는 것 같았다. 출근길에 보이는 멋진 아파트를 보며 막연하게 ‘나도 언젠가 저기에 살 수 있을까?’라는 헛된 꿈을 꾸며 혼자 웃기도 했다. 2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급여는 200만 원 초반으로 올랐고, 나는 더 열심히 저축했다. 그만큼 자신에게 가혹하게 채찍질하며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계속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았다. 사는 곳도 나아졌다. 대출을 조금 보태 보증금 6,000만 원의 원룸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거봐, 열심히 살면 계속 나아지잖아."라며...

지금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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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2세가 되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잠이 들기 전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심에 가끔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 나이에 이르니 보잘것없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는 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용기를 내고 싶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퇴직금을 꼭 관리해야 한다. 최근에는 주식 시장에 대한 관심이 많이 올라가서 투자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직장인 대부분이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퇴직금을 적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금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만,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분야라고 생각해서 아예 손을 놓는 분들이 많다.  현재 내 퇴직금 계정이다. 직장 생활은 13년 정도 되었다. 퇴직금을 본격적으로 운용한 기간은 7년이다. 처음에는 나도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적립하고 3% 내외의 이자 수익률로 자금을 가둬 놓았었다. 원금이 손실 되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이 있었고, 예측 할 수 없는 위기에 내 퇴직금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을 변화 시켜준 것은 '현명한 투자자'라는 책이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이 독서에 취미가 있다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만, 내용이 좀 어렵다. 사실 나에게는 좀 많이 어려웠다.   현명한 투자자를 읽은 후에 투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서적과 유튜브를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퇴직금을 가지고 무모하게 펀드 매매를 시도 했는데, 초심자의 행운이었는지 13,14년도에 투자한 중국, 인도, 베트남 펀드에서 꽤 의미 있는 수익률을 달성 했었다.  사실 내가 했던 펀드 매매 행위는 투자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시도를 통해서 퇴직금 운용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이후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